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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3 09:36

우리 동네 역사 알아보기, 도봉, 노원의 근현대

학교 다닐때 역사공부는 항상 고대부터시작해서 근현대까지, 세계에서부터 한국 순으로 했던 것 같다.
뭐 그렇게 공부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예전에 간디학교 양희창 선생님께서 역사나 지리를 살고 있는 동네에서부터 하는게 좋다는 말씀을 하셨다.
할머니 무릎 베고 누워서 듣던 동네 이야기 같은걸까?...사실 나도 직접 할머니에게 들어본 적은 없다.
 
내가 살고 있는 도봉구와 인근 노원구는 어떤 역사를 가졌을까?
곡식 창고였던 창동, 갑신정변때 왕비가 월계동까지 피신을 왔었던 것, 궁궐을 향해 안장된 내시묘, 상계동 마을... 재밌다.

작년에 도시넷에서 함께 참여한 도봉노원인문학강의 때 박은숙 선생님께서 진행했던 내용을 담아왔다.  
두고 읽어볼 만 하다.

출처 우리고전다시읽기 카페




근현대 우리 동네, 노원과 도봉은 어떤 역사를 가졌는가?


박은숙(한국역사연구회 근대사 분과)


1. 들어가며

  아름다운 도봉산과 수락산ㆍ불암산에 둘러싸여 있는, 그리고 한 가운데를 중랑천이 유유히 흘러 내려가는 노원ㆍ도봉지역은 그야말로 ‘산 좋고 물 좋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도시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먼 옛날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해 왔으며, 오랫동안 벼농사와 채소ㆍ과일 등을 재배하면서 자연부락을 이루고 살아왔다. 


                                                  

<그림 1> 도봉산                                   


<그림 2> 중랑천

 

  조선시대 노원ㆍ도봉지역을 관할했던 양주(楊州)는 수도 서울과 인접한 근기(近畿)지방으로, 강원도ㆍ함경도지방의 명태와 옷감 등이 들어오는 중요한 길목이었으며, 산세가 좋아 왕실 묘역으로도 각광받았다.

   노원ㆍ도봉지역은 근현대에 들어오면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그 변화의 물결은 철도를 따라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도봉과 노원에는 창동역과 성북역이 들어섰다. 근대의 상징인 철길을 타고 근대의 문물과 침략의 손길이 함께 뻗쳐 왔으며, 외세 침략에 저항하는 의병의 활동 또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노원ㆍ도봉의 혁명적 변화는 1963년 경기도에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시작되었다. 서울의 본격적 공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노원ㆍ도봉지역 또한 상전벽해와 같은 큰 폭의 변화를 겪었다. 대변동의 과정에서 전통문화의 상실과 주민들의 고통도 수반되었다. 21세기에 이르러 노원ㆍ도봉지역은 전통과 역사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진 활기찬 지역으로, 교육ㆍ문화의 주요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2. 한양과 인접한 동북지방 물화의 유통로

  수락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는 중랑천을 공유하고 있는 노원ㆍ도봉지역은 하천 일대를 중심으로 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있으며, 먼 옛날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그만큼 오랜 역사와 문화를 지닌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목(楊州牧)노원면(蘆原面)해등촌면(海等村面)으로 편입되어 있었다. 오늘날 노원구는 노원면에, 도봉구는 해등촌면에 속해 있었다. 한양 땅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양주골은 산수가 좋아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을 비롯한 왕실 묘역으로 주목받았고, 임꺽정이 살았던 무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도봉산ㆍ수락산은 우리나라 중추를 이루고 있는 태백산맥에서 뻗어내린 광주산맥의 줄기에 자리한 산으로, 멀리 강원도ㆍ함경도까지 연결되고 있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에 따라 예로부터 강원도ㆍ함경도에서 생산되는 북어와 옷감[北布] 등의 물산이 한양으로 들어오는 통로 구실을 하였다.

 


<그림 3> 조선후기의 도로

   도봉산 기슭에 형성된 누원점(樓院店)은 동북지방 물자의 중간 집하장으로서, 서울의 상권을 흔들오 놓기도 했다. 누원점을 무대로 활동하던 상인들은 동북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북어 등 각종 상품을 쌓아놓고 난매하였다. 특히 돈 많은 부상대고(富商大賈)들은 북상(北商)과 결탁하여 누원점에 물품을 대량으로 쌓아놓고 도산매하였다.

 


<그림 4> 누원점 형세

  내어물전 상인들의 보고 내에 “동북의 각양 어물을 갖고 서울로 들어오는 자는 누원(樓院)에 거주하는 중도아(中徒兒) 최경윤(崔敬允)ㆍ엄차기(嚴次起)ㆍ이성노(李星老) 등 3명이 번번이 도집(都執)ㆍ도고(都賈)하여 쌓아두고, 남문 밖 칠패와 이현 근처의 난전 상인 등처에 들여보내니, 수시로 값을 올리고 산매(散賣)하기 때문에 시전의 어물 값이 등귀하는 것은 실로 이 무리들의 작폐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들 본전(本廛)이 업(業)을 잃어버려 장차 흩어져 시장을 파하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각전기사(各廛記事)》 정조 5년(1781) 1월).

   이처럼 누원은 생산지 동북지방과 소비지인 서울을 연결하는 유통거점으로서 기능하고 있었으며, 칠패ㆍ이현 등지의 난전 및 사상과 연결되어 있었다. 칠패ㆍ이현 등 서울 시내의 사상도고들 또한 금난전권의 단속을 피하기 위하여 누원의 사상도고과 긴밀히 연결하여 시전에 타격을 가하기도 했다.

   노원구 월계동에는 각심사(覺心社, 覺心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고종 때 포도대장을 역임한 이경하(李景夏)의 별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경하는 대원군 때 포도대장으로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죽였는데, 낙동(駱洞, 현 명동)의 자기 집에서 죄인들을 심문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염라대왕처럼 무서워하여 ‘낙동염라(駱洞閻羅)’라는 별칭이 있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왕비와 세자가 그곳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갑신정변 마지막 날, 청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민비는 세자와 세자빈을 챙겨 궁궐을 빠져 나갔으며, 이경하의 별장이 있는 각심사로 가서 난을 피하고 후일을 대비하였다. 반면 고종은 창덕궁에 늦게까지 붙잡혀 있다가 북묘(北廟)를 거쳐 청 군영으로 갔다.
 

3. 철도를 따라 들어온 근대, 그리고 그 명암

  전통시대 동북지역 물산의 중간 집하장이었던 누원점은 개항 이후 타격을 받았다. 철도와 화륜선이 등장하면서 육로로 서울에 반입되던 물화가 철도와 화륜선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유통거점으로서의 화려한 명성이 퇴색되어 갔다.

   한편으로 서울에서 강원ㆍ함경도로 이어지는 옛 노선을 따라 철도가 놓이면서 노원과 도봉지역에도 새로이 근대를 상징하는 철도가 놓이고 창동역성동역이 생겨났다. 그것은 서울~원산 간의 경원선(京元線)과 서울~춘천을 잇는 경춘선(京春線)이었다. 이들 철길을 따라 동북의 강원도ㆍ함경도 물산이 서울로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근대의 문물 또한 전파되고 있었고, 외세의 침략적 손길 또한 뻗치고 있었다.

   경원선은 1914년 일제에 의해 개통되었으며, 현 도봉구 창동에는 창동역이 들어섰다.

   창동역은 동북지역의 산물과 미곡이 유입되는 통로였고, 근대의 상품과 문물이 들어오는 길이었으며, 일반 여객과 학생들이 승하차하는 역이었다. 1920년대에는 철도 침목을 베개 삼아 자던 창동리 주민 2명이 창동역 부근에서 참사를 당하기도 했다. 1930년대에는 ‘모뽀모껄(모던 보이, 모던 걸)’에게 ‘십원 돈 가지고는 넉넉히 놀러 갈 곳’으로 추천되는 곳이기도 했다.

   경춘선은 1939년 7월에 개통되었으며, 현 노원구에 성북역이 들어섰다. 개통 당시 역명은 연촌역(硯村驛)이었다. 경춘선은 여객과 화물의 운반이 많았으며, 특히 강원도 지역의 목재와 신탄(薪炭)을 운반하는 주요 통로였다. 
 

<그림 5> 동아일보 1923년 8월 18일

 

  개항 이후 침략적 외세가 밀려들면서 양주지역의병들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1907년 12월에는 의병대장 이인영(李麟榮)이 이끄는 의병 6,600여명이 양주에 집결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대한제국 군인 출신인 의병장 강기동(姜基東)은 1907년 군대해산 후 노원면과 포천 등지를 무대로 활약하였으며, 1910년 5월에는 30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양근 분원(分院)에 들어와 학생모자 등을 요구하여 즉시 마련해 주자,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노원 등 경기도를 무댈 활동한 의병장 강기동은 안타깝게도 1911년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그림 6> 신한민보 1911년 3월 15일


4. 1963년 서울특별시 편입과 상전벽해 같은 변화

   1945년 8ㆍ15해방으로 서울은 식민통치의 중심 ‘게이조(경성)’에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로서의 위상을 되찾았다. 서울은 해방의 기쁨과 이데올로기의 격렬한 대립, 6ㆍ25전쟁의 소용돌이, 4ㆍ19혁명의 한복판에 자리하면서 민족의 희로애락을 가장 첨예하게 경험한 도시였다.

   노원과 도봉지역 또한 8ㆍ15해방의 기쁨과 민족의 애환을 함께 경험하고 있었다. 6ㆍ25전쟁 때에는 창동과 쌍문동 일대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북한군 저지선인 창동선을 설치하고 많은 군대를 배치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치열한 전투 과정에서 많은 군인들이 희생되었다.

   1961년 5월 16일에 육군소장 박정희(朴正熙)를 중심으로 하는 군인 일부가 이른바 ‘5ㆍ16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박정희는 1963년 10월 15일에 실시된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박정희대통령시대’를 열어갔다.

   서울시는 1962년 1월에 서울시민헌장을 선포하였고, 1962년 1월 27일에 공포된 ‘서울특별시 행정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의해 내무부 관할에서 내각수반 직할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1963년 1월 1일자로 양주군에 속했던 노원과 도봉지역은 서울특별시 성북구로 편입되었고, 노해출장소(蘆海出張所) 관할이 되었다. 

  서울특별시로 편입된 노원ㆍ도봉 지역에는 1964년부터 세운상가와 청계천ㆍ남산 일대의 도심재개발사업 과정에서 쫓겨난 철거민들의 거주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상계동에는 이른바 ‘난민주택’이 들어섰으며, 도심에서 밀려난 철거민의 집단 이주지로 자리하였다. 이주민들은 대부분 다시 도심으로 나가 노동과 상업에 종사하면서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철거민 정착촌에는 교통과 상ㆍ하수도가 시급한 과제로 등장하였고, 괴질이 나돌아 어린이 등이 사망하기도 했다. 특히 교통문제는 매우 심각하였으며, 1967년 1월에 시영버스가 개통되었지만, 상계동에서 도심으로 빠져 나오는 출근길은 그야말로 ‘교통지옥’을 방불케 했다.

  이에 1967년 9월에는 상계동 주민들이 시청 앞 뜰에 모여들어 교통 현실에 항의하는 농성을 벌였으며, 1970년 6월에는 버스를 타지 못한 상계동 주민들이 청량리에서 밤샘 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림 7> 1964년 상계동 ‘난민주택’ 입주식            


<그림 8> 1967년 상계동 버스 개통식

   1967년에는 창동구획정리사업이 시작되었으며, 같은 해에 창동-우이동간 도로가 개통되고, 1974년에는 창동순환도로도 개통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교통 문제는 해결되어야 할 과제로 남겨져 있었다.

   1960~70년대에는 중랑천 창동 일대에 삼풍제지ㆍ샘표간장 등의 중소형 공장이 들어섰으며, 많은 주민들이 이들 공장에 임노동자로 취업하여 일하였다. 지금은 환경문제로 대부분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다.

  1966년에는 공릉동에 운동시설과 숙박시설을 갖춘 태릉선수촌이 들어섰으며, 오늘날까지 국가대표선수들이 금메달을 향한 꿈을 키우고 있다. 

   1973년 7월 1일자로 도봉구가 신설되자, 현 노원과 도봉지역은 모두 도봉구에 편입되었다. 이후 1988년 1월 1일자로 노원구가 신설되면서 창동ㆍ쌍문동ㆍ도봉동ㆍ방학동은 도봉구에, 월계동ㆍ공릉동ㆍ상계동ㆍ중계동ㆍ하계동은 노원구에 편입되었다. 

   오늘날 노원ㆍ도봉구 지역은 100만여명에 달하는 인구(노원 62만여명, 도봉 38만여명)가 살고 있으며, 젊은층의 비중이 높아 젊고 활기찬 구로 주목받고 있다. 또한 서울여대ㆍ덕성여대ㆍ광운대 등 여러 대학들이 포진해 있는 교육지구로 떠오르고 있으며, 지하철 1ㆍ4ㆍ6ㆍ7호선과 동부간선도로 등이 통과하여 동북부지역의 거점으로 기대되고 있다. 최근에는 공릉동에 있는 태강릉을 비롯한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노원ㆍ도봉지역은 옛날 자연부락을 이루고 살았던 모습과 철거민의 난민주택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으며, 이제 아파트 숲으로 채워지고 화려한 백화점과 대형 상가가 들어섰으며, 조성된 공원과 골프장 등이 자리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은 변화를 경험하였다. 이제 잃어버린 전통문화를 되돌아보고 전통과 오늘을 함께 아우르는 역사를 만들어 나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그림 9> 상계동 아파트                                 


<그림 10> 4호선 당고개역 연장개통(1993)

 

** 참고문헌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4, 《동명연혁고》 도봉구편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97ㆍ2000, 《서울의 산》《서울의 하천》
노원구, 1994, 《노원구지》
노원문화원, 2005, 《노원의 역사와 문화》
박은숙, 2008, 《시장의 역사》,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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